요즘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비싼 담배값도, 치솟는 버스비도 엿같은 과제도 아니다. 그래, 차라리 과제에 치이면서 교수님 욕도 하고 과제주제 때문에 머리 싸매던 옛날이 훨씬 살기 편한 것 같다.
"백현아."
박찬열을 만나기 전, 그 옛날 말이지.
"뒤질래? 이게 어디서 어른이름을 막 불러?"
"아 왜요. 스물다섯 선생 고3이랑 친구 먹게 해주겠다는데. 회춘하고 좋잖아요. 백현아."
"..왜."
"좋아해."
지랄도 가지가지다 진짜. 한 두마디 말을 더 섞는 것 보다 그냥 무시를 하는 것이 편하다는 걸 나는 과외 3개월만에 깨달았다. 그걸 알지 못했을 때는 싸우기도 많이 싸웠는데 어째서인지 이자식은 끝까지 싱글벙글 웃는 상이었고 나만 콧바람 씩씩 뿜더라. 젊어서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건지, 박찬열이란 사람 자체가 약오르는 캐릭터인건지. 어쨌든 지금은 가볍게 무시를 해주니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돼고 아주 좋다. 가방 속에서 프린물을 꺼내고 아직도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있는 고딩의 손에 연필을 단단히 쥐어줬다. 내가 생각해도 많은 양의 문제들이었지만, 과외를 시작하고 첫 시험에서 찬열이의 화학성적이 떨어졌다고 은근하게 말하시던 어머님을 생각하면 이쯤은 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 고3이 죽어라 문제를 풀어야지 뭘 하겠어?
"일단은 하는데 까지 하자. 이 시간에 끝까지 다 푼다 생각하고 풀어."
"이거 솔직히 인간적으로 많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쌤, 진짜. 아아-너무 많아요 많아."
"시끄러 임마. 다 너를 위해서 이러는거니까 잔말말고 풀어. 못 푸는 것도 아니면서. 어? 얼른."
"그럼 한 문제 풀 때 마다 뽀뽀해주세요."
"미친.. 빨리 문제 풀어!"
지금이 바로 박찬열이 날 힘들게 하는 순간이다. 뽀뽀-그러니까, 연인들사이에서 애교있게 통하는 스킨십따위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고등학생이 세상 어디있겠냐고! 얼굴이 별로면 몰라, 잘생기기까지 했다. 키도 컸고-너무 빼짝 마른게 약간 흠이지만-목소리도 좋았고 무엇보다 내가 사람을 만날 때 중요하게 여기는 웃음. 웃음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빨을 다 보여줄듯이 환하게 웃을 때면 철없는 아이같으면서도 귀엽고 순수해서 나도 슬며시 웃음이 나오곤 했다. 금방 표정을 고치긴 하지만. 어쨌든! 혈기왕성하고 호기심 많은 나이대니까 이 철없는 고딩은 분명 짖궅은 장난쯤으로 생각하는 걸텐데 나는 거기에 일일히 반응하고 있으니 힘들어 죽겠다는거다. 쉽게 설레버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힘들다고. 아냐 고딩아.
"한 문제 다 풀었으니까 뽀뽀 해주세요. 백현이 뽀뽀-"
"너 진짜 혼난다. 얼른 마저 풀어."
"뽀뽀 해주면요."
"야. 너 자꾸 장난칠래?"
"장난 아닌데?"
"..됐어. 말을 말자."
그런 얼굴로 장난 아니라고 하니까 진짜 장난 아닌 거 같잖아. 아, 짜증나. 6살이나 어린 놈한테 흔들리는 꼴이 참 안쓰럽다. 변백현 다 죽었네. 누구 손에 놀아나고 그런 사람 아니었는데... 급하게 담배가 말린다. 바짓주머니를 더듬거려 담배갑과 라이터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면 따라서 움직이는 작은 머리통을 향해서 문제나 풀어. 인상을 써주고 방을 나왔다. 찬열이네 어머님이 직장인이신게 참 좋다. 과외 중간에 마음대로 나와 담배도 피울 수 있고. 찬열이네 집은 아파트 2층이었기 때문에 계단으로 1층까지 내려가 동 밖으로 나왔다. 약간은 어두운 하늘을 한 번 바라봐주고 동 앞 벤치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요즘은 길거리에서 마음놓고 담배도 피지 못하는 세상이라서 사람들이 없을 때 잽싸게 빨고 불을 꺼야했다. 어린아이라도 지나가면 코를 틀어막고 날 노려보는 시선이 엄청나게 따갑기 때문에. 반도 태우지 못한 담배를 던지고 발로 비벼 불을 껐다. 속만 더 답답해진 것 같다. 결국 벤치에 앉아 멍하게 하늘만 바라보고 있게 됐는데, 지나가는 구름에 뜬금없이 박찬열 얼굴이 띠용 떠올랐다. 선생님 뽀뽀-우우- 으악! 사라져!!! 눈을 꼭 감고 허리를 숙였다. 시발. 시바아알..박찬열 제발 사라져....
*
"다 풀었냐."
"아뇨. 하나도 안 풀었는데. 아, 한 문제 풀었다."
"...뭐?"
손에서 담배냄새가 날까봐 옷에 벅벅 문지른 다음에 얼른 앉아 종이를 확인했다. 정말, 깨끗하다. 아까 풀었던 한 문제를 빼고는 새-하얘.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나오질 않아 피식피식 웃었다.
"너 진짜."
"선생님이 뽀뽀 안 해줬잖아요. 내 탓 아니에요. 선생님 탓이지."
"장난이라도 이쯤에서 그만 둬. 받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박찬열."
"장난 아니라니깐요."
시발. 얘 혹시 내가 싫나? 그래서 도가 지나치는 장난을 치고, 또 이런 식으로 날 엿먹이는걸까? 나보고 알아서 떨어지라고? 손에 들린 두툼한 종이뭉치가 구겨졌다. 방금 나가서 피고 왔는데 또 피고싶어 진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서 장난 아니에요, 그럴 때 마다 나는 심장이 쿵쾅거리다 못해 아파 죽겠다. 흔들리면 안 돼. 넘어가서도 안 돼. 버텨 변백현.
"장난 아니라고요."
"하?"
"내 진심 안 느껴져요? 둔한 것도 아니면서 왜 몰라? 모르는 척 하는거에요?"
"...너 지금 무슨 소릴,"
"나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뽀뽀해달라 그러는 미친놈 아니에요."
"..찬열아."
"예뻐 해달라고 애교 떨지도 않는다고요."
"박찬열."
"밤 늦게 전화해서 보고싶다는 소리도 안 하고요, 아프면 걱정도 안하고요. 내 앞에서 핸드폰 붙잡고 킬킬대면 누구랑 연락하냐고 질투하지도 않고요."
아. 숨이 안 쉬어져. 아직도 심장은 아프게 뛴다. 이러다가 심장마비로 죽으면 어떡하지, 쓸데없는 걱정도 들었다. 이번 장난은 퍼펙트하게 성공했다 찬열아. 어쩜, 거짓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그래서 순간 내가 너를 와락 끌어안고 나도 그랬어-하고 내 진심을 말해버릴 지도 모르겠다. 종이를 쥐고 있는 손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고 피가 통하지 않아서 손끝은 하얘졌다. 오롯이 나만을 담고 있는 까만 눈동자에 온 마음을 빼앗겨 버렸으니 나는 이제 답도 없다. 출구도 입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나는 혼자 허덕이며 사랑을 하겠지. 사람 마음 하나 가지고 노는 게 너는 참 쉽구나. 대단하다 박찬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주말이던 언제던 보충 해줄테니까 걱정은 말고."
"선생님."
"..그리고 이거는, 안 풀어도 돼. 이제 생각하니까 확실히 무리긴 하네. 내가 다른 거 준비해서 올게. 숙제 없다고 놀지 말고. 문제집으로 미리 예습 해 놔. 검사 할거야."
"변백현."
"..."
팔목이 붙잡혔고 한 쪽 어깨에 맸던 가방이 툭하고 떨어졌다. 지퍼를 닫지 않아서 가방 안의 물건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나는 팔목을 비틀어 빼내고 쭈그려 앉아 물건을 주워 담았다. 찬열이가 반 잘라 준 지우개. 찬열이가 준 연필. 찬열이가 준 목캔디. ...씨발. 계산기까지 다 집어넣고 지퍼를 꼭꼭 닫았다. 그리고 가방을 매고 일어나서 방을 나가려고 했는데 또다시 박찬열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번엔 팔목이 아닌 몸 전체가 붙잡혔다.
"때리든 욕을 하든! 다시는 나 안 보겠다고 해도 좋으니까 이러고 잠깐만 있어요. 부탁이에요."
"장난 치지 말라고..하지 마. 놔. 놓으라고. 놔 줘. 찬열아."
밀어보고 몸부림을 쳐봐도 꿈쩍을 않는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더 힘을 주는 박찬열 때문에 나는 반 포기상태로 얌전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키차이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지만 박찬열 가슴팍에 얼굴을 박는 자세로 있는데 지금 내 귀에서 쿵쿵, 심장소리가 크게 들린다. 내건가 싶어서 심장 위로 손을 올려보면 소리랑 엇박으로 뛰는 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빠르게 뛰는 건 차이가 없었다. 그럴리가 없는데... 뻣뻣하게 힘을 주고 있던 목을 편하게 하고 찬열이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엄마. 나 얘 싫어. 미친놈이 장난치고 너무 진지하잖아. 그래서 내가 바보같이 기대를 하게 만들잖아. 그래서 나도 조금은 진심을 내보여도 괜찮을 거라고 안심하게 만들잖아. 나 진짜, 얘 싫어.
"좋아해요. 많이 좋아해. 선생님한테 이러는 거 미안한데 도저히 말 안하고는 못 버티겠어서.."
"..미안. 미안해 찬열아. 미안해."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요. 선생님 생각해서 참아야지 참아야지 했는데 이렇게 병신같이 굴어서 진짜 미안해요. 내 얼굴보고 공부 가르치는 거 불편하면 과외 그만해도 돼요. 나랑 연락 끊어도 돼. 나는, 선생님한테 좋아한다고 말한 것 만으로도 만족이니까."
"미안. 나는.. 네 말대로 그렇게 할 생각이 없어."
"선생님..."
역시 덩치만 크지 속은 여린아이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더라니, 쉽게 밀리는 몸을 밀어내고 얼굴을 확인하니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손을 뻗어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주고 엉망이 된 머리도 정돈해주었다. 남자의 눈물은 진심이라던 말. 이제부터는 믿을란다. 살짝 까치발을 들어 찬열이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당겨 안았다. 대롱대롱 매달리는 폼이었지만 확실한 건 내가 찬열이를 안아주고 있다는 거다. 끅끅 숨을 고르는 19살짜리 덜 익은 아이를 말이다. 그러면 이 아이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곧이 곧대로 내비추며 일단은 나를 끌어 안는다. 그리고 속삭이지. 뭐해요 백현아...?
"쓰읍. 버릇없어 너."
"지금 이게, 뭔..., 네?"
"너랑 연락 끊지도 않을거고 과외를 그만 두지도 않을거라서 미안. 그리고, 장난이라고 생각해서 더 미안."
"..."
부끄러워서 얼굴은 안 보려고 했는데 또 힘에 밀려서 강제로 얼굴을 마주했다. 내 어깨를 부여잡고 떨리는 눈동자로 날 응시하는 찬열이에 온 몸이 타오르는 것 같아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찬열이에 의해 다시 고개가 들리고 어쩔 수 없어진 나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눈 떠요."
"쪽팔려서 안 돼..."
"그래 그럼. 눈 감고 있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녀석의 향이 훅 다가왔고 입술도 다가왔다. 생각했던 것 보다 박찬열의 입술은 차가웠다. 차가운 입술이 촉하고 닿았고 내 입술을 진득하게 물어 삼켰다. 혀의 왕래만 없었다 뿐이지 입술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온갖 짓은 다 한 것 같다. 학학. 입술을 떨어트리고 밭은 숨을 서로 내쉬었다. 나는 살짝 붉어진 볼로 찬열의 볼을 감싸고 떨리지만 용기있게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좋아해. 많이. 장난 아니구. 찬열이는 환하게 웃었다. 얘 웃는 모습을 이토록 가까이서 본 적은, 아마 없었지? 있었으면 난 지금 살아있지 않았을거야. 심장 떨려서 진작에 죽었겠지.
"박찬열 너, 어린나이에 벌써 코 꿰인거야. 큰일났다 이제."
"나는 좋아요."
"대학가고 나이먹으면 예쁜 여자들 깔렸어. 내가 그 때 왜 그랬지-하고 후회할지도 몰라 너."
"후회 안 해요. 선생님보다 예쁜 사람 없어."
"그리고 나는 이제 늙어서 가벼운 연애같은 거 안해. 한 번 만나는 것도 되게 신중하다고."
"네 네. 알겠습니다. 내가 선생님 책임 질거에요. 결혼도 나랑 하고, 가정도 나랑 꾸리고 늙는 것도 나랑 같이 늙어요."

